낯설고 새롭고 모르는 것 앞에서 그것을 경험할지 말지 판단할 때 우리 모두 리스크를 의식한다. “경험하고” 결정할까 아니면 경험하지 않고 “직감적으로” 판단할까, 고민된다. 경험하고 판단하면 경험의 깊이와 양에 따라 자기 판단에 확신이 조금은 더 있을 듯 하고 경험하지 않고 판단하면 어쩌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리라, 재어본다. 단, 경험의 혜택이 클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을 놓칠 각오도 해야 한다. 그런데 또, 이 “경험”이란 게 어떤 단체에 들어갈까 말까 혹은 어떤 프로그램을 수강할까 말까와 같은 몇 가지 한정된 선택에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 자기 안의 고귀함을 찾아가는 지속적인 과정이 그 본질일 경우라면? 어디까지 더 경험해야 제대로 경험한 것일지 모르니 경험의 과정 중에도 여전히 리스크와 두려움이 늘 있다. 너무 많이 걸어간 후에 돌아가기엔 이미 어둑어둑 해 저물어 갈 때 이 길이 아니라고 깨달을까 봐. 그러나 생각해 보면 모든 선택이 그러하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장 유명한 시 “가지 않은 길”에서 화자가 말하듯이 한 번 선택한 “길은 길로 연이어지니” 인생의 그 어떤 신중한 선택도 선택하지 않은 길과 나란히 놓고 우열, 옳고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 길”이 아니라 “가지 않은 그 길”로 걸었더라면 어떠했을지 인생을 돌이켜 그 시점으로 돌아가 그 선택을 실제로 해 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존재에 모종의 보편성이 있어 인간이 다르면서도 서로 연결된 존재라면 어쩌면 내가 선택한 길로 걷고 또 걸으며 끊임없이 ‘성장’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의 어느 깊이에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로 나와 나란히 걸어온 또다른 ‘나’를 만나리라 느낀다. ‘나’인 ‘그’는 나와 매우 다른 삶을 살아서 그간 어쩌면 무수히 부딪혔을 것이나 내가 알아보지 못했음을 그때에는 자각할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와 같이 나의 성숙 성장 확장을 ‘그’와의 궁극적인 재회로 막연히 상상한다. 그 만남 속에 나는 좀더 온전해질 것 같고 어쩌면 비로소 수많은 타자들 속에서 그를 이미 거듭 거듭 보았음을 선연히 기억해 낼 것만 같다. 그런 의미에서 치유와 성장은 ‘기억의 회복’인 것만 같다. 그것은 또 어쩌면, ‘카르마’의 풍경이 확장되고 그 안에서 나의 개별성들과 무한성의 파노라마를 동시에 일별하는 것일지도. 프로스트 시의 마지막에 화자는 어느 미래에서 오늘을 회상한다. 먼 과거의 어느 아침 숲 속에 똑같이 아름다운 두 길이 있었고 그 날 인적이 덜한 길을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그렇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나도, 그 노시인처럼 말하리라. 그러나 나는 내 길의 어느 끝에서 내가 가지 않은 길을 다시 만나리라 꿈꾼다. 내가 걸은 길과 걷지 않은 길이 뫼비우스적 안과밖을 이루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어느 깊이가 신의 약속처럼 나의 선택처럼 얼른거리기에. 그러하기에 내가 택한 길을 내가 할 수 있는 한 깊이, 힘 있게, 그러나 너무 무겁지 않게 발걸음은 사뿐히, 그러면서도 부단히, 매일, 매 순간 걷고 싶은 것이다. Breathe. 오늘 아침 신성한 응답. That’s it.